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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개척지 터

현주소 : 블라디보스톡 포그라니치나야 거리

한인들이 처음 이주해서 살던곳.
1860년 전후 한인들의 연해주 이주가 시작되었다. 1911년에는 이주 한인수가 6만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포그라니치나야 거리로부터 아무르만에 접한 남쪽 언덕과 그 아래 저지대에 이르는 일대.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 : 한인거주지)는 최초 이주 한인들이 거주했던 지역이다.
구 개척리는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과 한인학교와 한인 언론기관이 위치해있던 곳이다.

신한촌 기념비

현주소 : 블라디보스톡 하바롭스카야 일대

1911년 5월 러 당국이 콜레라 예방을 이유로 구 개척리에 거주하던 한인들을 신한촌으로 이주시켰다.
이후 신한촌에는 각종 한인단체의 사무소가 들어서면서 항일 독립운동, 혁명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담당 하였다.
1999년 8월 한민족 연구소가 3.1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신한촌을 기리기 위해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 세개의 기념비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1919년 국내에 만들어진 한성임시정부, 상해에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블라디보스톡에 만들어진 대한국민의회 이 3곳을 의미한다고 한다.
1999년 8월 한민족 연구소가 3.1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신한촌을 기리기 위해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안중근의사 단지 동맹비

현주소 : 연해주 크라스키노 마을

단지동맹은 1909년 안중근 의사가 동지 11인과 함께 무명지를 끊어 태극기 위에 혈서를 쓰며 조국의 독립을 다짐한 사건이다.
“1909년 2월 7일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결사동지 김기용, 백규삼, 황병길, 조응순, 강순기, 강창두,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김천화 등
12인은 이곳 크라스키노 (연추하리) 마을에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단지동맹하다.
이들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각기 왼손 무명지를 잘라 생동하는 선혈로 대한독립이라 쓰고 대한국만세를 삼창하다.”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2001년 10월 18일 러시아정부의 협조를 얻어 이 비를 세웠다.

최재형 선생 생가

현주소 : 우수리스크 수하노바32

최재형 선생은 한인사회의 지도자로서 독립운동과 국민계몽운동에 헌신하신 분이다.
최재형 선생은 1908년 의병단체 <동의회>를 결성한다. 안중근 의사가 소속됐던 비밀 결사체 <동의단지회>를
만들어 결연한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왼손 무명지를 잘랐다.
그는 1910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이후에 안중근 의사 가족들의 의식주를 책임졌다.
계몽운동을 위해 1910년 재정난으로 폐간된 <대동공보>를 재발행 했고, 격렬한 논조로 일제를 규탄했다.
또한 교포자녀를 위한 한인학교도 설립했고 1911년에는 <권업회>를 창설했다. <권업회>의 목표는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군대의 양성이었다.
북만주에 사관학교를 세우고 인근 단체들을 통합해 1914년에는<대한광복군정부> 를 수립했다.
만주에 흩어져 활동하던 이상설, 이동휘 등이 참여했다. 최재형 선생은 연해주 지역 항일운동의 실질적인 버팀목이었다.
이를 고깝게 본 일본이 1920년, 신생 소비에트 공화국의 빨치산이 일본군을 학살한 ‘니항사건’을 빌미로 시베리아 혁명군과 한인의병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이때 최재형 선생을 체포하여 총살했다.

전로한족회 중앙총회 회의장소

현주소 : 우수리스크 체체리나 32

전로한족회 및 대한국민의회는 3·1운동 이전 이미 해외에 존재하던 임시정부 수립운동 흐름의 구체화로서 의미를 갖는다.
재러 한인들은 1918년 그간 개별적으로 조직된 각종단체인 한족회(1905년), 대한교육청년회(1907년), 권업회(1911년)등을 규합하여
전로한족회중앙총회를 조직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직후 새로운 국제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동 조직을 대한국민의회로 개편하였다.

이상설 선생 유허지

현주소 :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가

1907년 이상설 선생은 고종의 밀서를 받고 헤이그 만족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 등을 대동하고 사행하여 독립운동을 주장하고,
이어 연해주에서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 중 순국하게 되었다.
그의 유언에 다라 수이푼 강가에 유해를 뿌렸으며, 2001년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이 비를 건립하였다.